책 이야기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이원보)]를 읽고서

바람2010 2012. 10. 21. 12:17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뭐 이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렸지?

 - 왜 이런 책이 많이 안 팔렸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책 내용 못지 않게 어떤 책이 대중의 호응 혹은 외면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해진다. 사실 난 전자 같은 질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나름 충분히 검증된 책 위주로 읽고, 세칭 베스트셀러라는 이유로 책을 읽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게 후자 같은 질문을 하는 경우는 있다. 이원보 선생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은 바로 그 아주 드문 경우이다.

 

같이 독서모임을 하는 후배가 노동운동사를 읽고 싶다면서 어렵게 찾아 낸 책이었다. 사실 난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고, 이제는 절판되어 몇 권 구하기도 어려운 책이라 굳이 이 책을 토론 교재로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의외의 기쁨을 가져다 준 책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럼 그 과거는 누가 지배하지? 당연히 현재를 지배하는 자이다.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비상식적인 상황과 힘 겨루기가 진행되는 까닭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는 공분하면서, 정작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왜곡에 대해서는 잠잠하다. 이 또한 과거에 지배했던 자가 여전히 현재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나아가 미래를 계속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다룬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배계급의 역사인가, 피지배계급의 역사인가? 인물/영웅 중심인가, 세력/집단 중심인가? 사건 위주인가, 일상 위주인가? 정치/상부구조 중심인가, 경제/하부구조 중심인가? 의미/해석과 사실/fact의 긴장 …… . 더구나 제한된 분량으로 다룰 수 밖에 없으니, 취사선택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에 적절히 잘 담아 냈다. 성공한 책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쟁점이 되었던 문제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몇 년간 더 부각된 문제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 해방정국에 대한 평가, 박정희의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 등 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담고 있다.

 

- “조선 봉건사회 후기에 들어 신분제가 무너지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는데(27), 왠 식민지 근대화론?

- 우리 민족의 자주국가 건설 노력이 외세에 의해 무산

-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175)

 

박정희와 경제발전 신화는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이다. “독재는 했지만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독재는 불가피 했다.” ⇔ “경제는 발전시켰지만 독재자였다,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대충 이런 대립 구도에 더욱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박정희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도 별로 없고, 오히려 현재까지 한국 경제가 갖고 있는 고질적 문제들을 잉태했다는 주장. 박정희 정권 때 이루어진 경제발전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래야 독재 논쟁도 완결될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 일제는 농업부문에 있어서 농촌진흥운동과 남면북양(南綿北羊)을 내세웠습니다.”(87)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의 모태이다.(경향신문, 2012.8.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72213085&code=910100)


미국이 요구하는 근대화정책에 따라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한일회담을 급속하게 추진했습니다.”(173)


결국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이 지닌 이러한 모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두드러졌고 경제성장은 장애에 직면했습니다.” (175)

 

이 책을 보면서 우리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 전평과 현재의 노동조합.

 

해방 직후인 1945 11 5~6일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전평)이 발표한 <일반행동강령> <실천요강>(113)을 보면 당시 노동운동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음을, 거꾸로 현재 우리 노동운동의 일천함을 느끼게 된다.


<일반행동강령>

1. 노동자의 일반적 생활을 보장할 최저임금제를 확립하라.

1. 8시간노동제를 실시하라.

1. 성∙연령∙민족의 구분을 불문하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지급하라.

1. 7 1휴제와 연 1개월간의 유급휴가제를 실시하라

1. 부인노동자의 산전 산후 2개월간 유급휴가제를 실시하라.

1. 유해위험작업은 7시간제를 확립하라.

1. 14세 미만 유년노동자를 금지하라.

1. 노동자를 위한 주택, 탁아소, 오락실, 도서관, 의료기관을 설치하라.

1. 부인노동자를 위한 공장설비(탁아소, 수유소, 환착소(換着所) )를 고용주 부담으로 즉시 실시하라.

1.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계약권을 확립하라.

1. 공장폐쇄, 해고와 실업은 절대 반대한다

1.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적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일체 기업을 공장위원회(관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노동자는 그 관리권에 참여하라.

1. 실업, 상병, 폐질 노동자와 사망자의 유족생활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도를 실시하라,

1. 착취를 본위로 한 일체의 청부제를 반대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시위의 절대 자유

1. 농민운동을 절대 지지하자.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자.

1. 조선의 자주독립 만세

1. 세계노동계급 단결 만세.


<실천요강>

조선의 완전독립 즉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족통일전선정권의 수립에 적극 참가.

민족자본의 양심적인 부분과의 협력하여 산업건설을 함으로써 부족공황, 악성인플레의 극복.

③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자 대중을 교육 훈련하여 자체 조직을 확대 강화한다


전평의 주도 아래 결성된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가 1946 9 26일 발표한 총파업 선언서(125) 또한 주목할 만 하다.


   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1.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도 인상하라!

1. 전재민(戰災民), 실업자에게 일과 쌀을 줄 것!

1.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1.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1. 일체의 반동 테러 배격!

1.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할 것!

1. 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1.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를 즉시 석방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1. 해방일보, 인민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된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이 책이 처음 발행된 것은 2005 5 25, 그러니까 대략 7년 반 전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운동에 대해 짧게 평가하면서 쓴,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은 지금 상황에도 적절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노동운동은 스스로의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부단히 자기혁신을 펴나감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지 모르겠다. 이러한 과정과 노력 없이는 한국노동운동의 새로운 100을 말할 수는 없으리라.

 

신자유주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노동의 수량적 유연성과 임금소득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노동운동은 여전히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노동운동 고립화를 위한 공세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고, 노동자 계급 내부적으로 연대의 기반이 허물어짐으로써 노동조합의 대표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 또한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성공과 패배, 도약과 침체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노동운동은 스스로의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부단히 자기혁신을 펴나감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398, 책의 마지막 문단)

 

< 2005 5 25일 발행, 2012 818~ 9 26일 읽고 10 21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