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여행

바람, 터키를 가다 9: 1600년 동안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 1 (2017.1.5. 목)

바람2010 2017. 2. 13. 23:45
이스탄불에서는 나자르 투어의 클래식 이스탄불 투어(1/5) 로맨틱 이스탄불 투어(1/6) 참가했습니다. 이틀 동안 함께 한국인 가이드는 외모와 이름 모두 비범하신 , ‘유럽에서 유일하게 한국 남자들이 인기 있다 터키에서 여심을 흔들고 계신 분인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돌 출신이라네요. 그리고 젊은 터키인 남성 가이드. 터키에서는 터키인만이 관광 가이드를 있답니다. 그래서 설명은 한국인 가이드가 하더라도 터키인 가이드가 항상 함께 다닙니다. 보통 없이 동행하지만, 한국인 가이드가 모르는 것을 물어 보면 답해 주기도 하고, 돌마바흐체 궁전 같은 곳에서 빨리 입장할 있도록 해주기도 했습니다.

 

첫날 클래식 이스탄불 투어에는 한국에서 젊은 여성들이 함께해서 더욱 즐거웠습니다. 시작은 아야소피아 박물관.

 

아야소피아 박물관

537 비잔티움 제국의 성당으로 지어져 961 동안 교회로 사용되었고, 이후 481 동안은 아야소피아 자미로 사용되다가 1935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역사에는 영광 못지 않은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본래 360 콘스탄티누스 2 시절 완성된 교회가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고, 416 테오도시우스 2 다시 지어진 교회는 532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절 니카 반란으로 파괴됩니다. 황제는 니카 반란에 참여했던 시민 3 명을 무참히 학살하고 반란 파괴된 교회의 재건을 명합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기독교 우주관에 따라 네모난 건물 위에 둥근 모양 지붕을 얹고, 교회가 하나임을 표현하기 위해 내부에는 기둥이 없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요구를 합니다.

 

유명한 수학자였던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와 트릴레이스의 안테미오스가 설계하고, 살아 남은 시민들이 학살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교대로 일해서, 일일이 조각을 붙이고 염료를 칠하면서, 많이 사람들이 다치고 죽으면서,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5 10개월만에 완공하게 됩니다.

 

55.6m 높이 위에 지름 31m자리 돔을 올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벽돌 사이에 두껍게 회반죽을 바르고 대리석 기둥 위아래에 납기둥을 넣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내진 설계가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촉박한 일정으로 곳곳에 날림 공사의 흔적도 있습니다.

 

1453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멧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대성당을 자미로 개조했습니다.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파괴하는 대신 이슬람에서 우상 숭배로 여기는 모자이크만 회칠로 가리고, 미흐랍과 미나레를 추가로 지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강압이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게 했고, 술탄 메흐멧 2세의 관용이 건축물이 보존되도록 것입니다.

 

본당의 웅장한 모습 돔의 정중앙 아래서 찍은 사진. 지진으로 정중앙이 이동

본당 입구 왼쪽 구석에 있는, 그레고리우스 성인이 자신의 치유 능력을 옮겨 놓았다는 흘리는 기둥’. 돌의 습기가 눈병을 치료하고 생식력을 증대시킨다고 믿은 사람들이 돌을 보호하는 동판을 뚫어 구멍을 냈습니다. 지금은 구멍 안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바퀴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에 관광객들이 줄을 섭니다. 저는 엄지손가락을 바퀴도 돌리는데 성공했으나, 돌리는데 집중한 나머지 소원은 빌지 않았다는….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2층에서 내려다 본 본당의 모습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모자이크들은 대성당을 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화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규정한 787 니케아 2 공의회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데이시스: 심판의 모자이크. Deësis mosaics

심판의 날을 맞은 인류를 위해 세례 요한과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청하는 내용으로, 현재 전체의 2/3 정도가 유실되었지만 남은 부분만으로도 아야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모자이크로 손꼽힌답니다.

 

 

 

 

콤네누스 황제 모자이크 Comnenus Mosaics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요한네스 2 콤네누스 황제와 이레네 황후, 그리고 황후 옆에 아들 일렉시우스가 있는 모자이크.

 

 

 

 

 

 

 

 

 

 

황후 조에 모자이크 Empress Zoe Mosaics

예수를 중심으로 조에 황후와 그녀의 번째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세가 새겨진 11세기 작품. 황후 조에의 결혼 경력에 따라서 황제의 얼굴과 명문, 조에의 얼굴 부분 등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설교단 모자이크 Apse Mosaic

1 본당 설교단 안쪽에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와 좌우에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본래 6세기에 그려졌으나 성상 파괴 운동으로 파괴된 것을 9세기에 다시 그린 것인데 현존하는 모자이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흐랍과 설교단이 세워진 밑에서 위를 보면 황금빛 배경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상이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제국의 모자이크 Imperial Gate Mosaic

1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제국의 위에 있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 예수 앞에 엎드려 있는 사람은 모자이크가 만들어진 9세기 당시 황제 레오 6세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하는 모습입니다. 번의 결혼으로도 아들을 얻지 못한 레오 6세는 아들을 낳은 연인 조에 카르보노프시나와 당시 교회가 금지한 번째 결혼을 강행했고, 결국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남서쪽문 모자이크 Southwestern Entrance Mosaic

1 본당 출국 쪽에 있는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와 황제들의 모습이 새겨진 10세기경의 모자이크. 오른쪽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플러스를, 왼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단돌로(Henricus Dandolo) 무덤 자리

성지 탈환을 위해 지나가게만 해달라고 간청했던 4 십자군은 약속과 달리 콘스탄티노플러스를 점령하여 무려 57 동안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치명상을 입었고 성물과 교회의 보물들은 해외로 팔려 나갔습니다. 동방 정교회와 라틴 교회는 회복할 없는 불화에 빠졌습니다. 당시 본래 목적인 성지 탈환 대신 같은 기독교 국가의 수도를 점령하고 약탈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 베네치아의 도제인 단돌로인데, ‘데이시스: 심판의 성화 맞은편에 단돌로의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이후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지만, 자리에 그의 이름을 돌에 새겨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술탄아흐멧 자미(블루 모스크) Sultan Ahmet Camii 

터키의 대표적인 모스크이자 이스탄불의 상징. 1609 술탄 아흐멧 1세의 지시로 건축을 시작해 1616 완공되었습니다. 2만여 개에 달하는 파란 이즈닉 타일로 장식되어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서방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술탄아흐멧 자미는 중앙 돔을 중심으로 수많은 작은 돔이 연이어 있는 형태로, 기둥으로 받쳐진 아치들 위에 작은 돔들이 있고 위로 갈수록 숫자가 점점 적어지다가 마지막에 커다란 중앙 돔으로 마무리됩니다. 27.5m 길이의 중앙 위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별과 초승달이 세워져 있고, 주위에는 창이 여러 있어 자연광이 자미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중앙 돔이 개의 기둥에 의해 받쳐집니다. 이슬람 성지 메카의 카바 방향을 알리는 미흐랍(Mihrab)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밈바르(Mimbar 설교단) 설치되어 있고, 밈바르 왼쪽에는 술탄 전용 기도실도 있습니다.

 

왕의 출입문과 평민의 출입문이 따로 있었던 아야소피아와 달리 술탄아흐멧 자미는 같은 문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답니다.

 

 

술탄아흐멧 광장(히포드로모스) Sultanahmet Meydani

정식 명칭은 술탄아흐멧 광장이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경기장인 히포드로모스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20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처음 건설한 , 324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확장한 길이 450m 130m 말굽 모양 경기장이 이곳에 있었지만, 4 십자군 점령 당시 약탈과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었고, 현재는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와 청동 기둥,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만 남아 있습니다.

 

벤허의 작가가 곳에서 영감을 얻어 전차 경주 장면을 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인 투트모스 3세가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 세웠던 것을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0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본래는 높이 30m 정도였지만 운반 과정에서 아랫부분이 깨져서 현재는 20m 정도 높이입니다. 아래 받침대는 오벨리스크를 자리에 세우면서 만든 것으로 전차 경주를 관람하는 황제 가족과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작업 모습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청동 기둥

오벨리스크 사이에 있는 모양 청동 기둥으로, 기원전 5세기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세운 것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6 곳으로 가져왔습니다. 원래는 기둥 꼭대기에 3개의 머리와 황금 그릇이 있었지만, 4 십자군 점령 당시 황금 그릇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100 안에 머리 하나가, 1700년경에 머리 개가 사라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

10세기 콘스탄티누스 7세가 세운 것으로, 원래는 32m 높이로 탑을 쌓고 조각을 새긴 청동판을 새긴 아름다운 기념탑이었습니다. 하지만 4 십자군이 청동판을 벗겨내면서 모습을 잃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1894 지진으로 훼손된 것을 복구한 것입니다.

 

 

 

 

 

 

 

 

 

 

 

 

 

 

 

 

 

맛도 좋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배낭여행자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도이도이 식당 Doy Doy Restaurant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가지 음식을 주문했는데 치즈 피데가 제일 맛있었습니다. 괴레메 피데 집에서 먹은 것보다 여기 피데가 나았습니다. 맛있게 먹느라 사진은 제대로 찍었네요.

 

 

알만 체스메시(카이저 빌헬름 분수)

1898 독일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번째 이스탄불 방문 기념 분수. 독일에서 만들어서 배로 운송, 곳에 설치했답니다. 오스만제국 시절부터 독일과는 우호적인 관계였고, 그래서 독일에 터키인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고 하네요. 아름다운 건축물인데 전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찍었네요. 인터넷 검색하시면 분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쉽게 찾을 있습니다.

 

 

 

 

 

 

 

 

 

예레바탄 지하 저수조(지하 궁전)

도시의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 공사를 시작하여 532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완공된 지하의 저장소. 길이 138m 64.6m 높이 9m 공간으로 8 톤의 물을 저장할 있었으며, 현존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저수지 가운데 최대 규모입니다. 전국 각지의 고대 건물에서 운반해 대리석 기둥 336개가 12열로 정렬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주고, 때문에 지하 궁전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안쪽의 기둥은 메두사의 두상을 받침으로 쓰고 있어 유명한데,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배치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네요.

 

물고기가 산다

기둥 336개가 12열로 정렬되어 있다

여기도 엄지 돌리는 구멍이…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감히 메두사 두상을 하나는 거꾸로 뒤집어서, 하나는 옆으로 뉘여서 받침대로 기둥 .

 

 

이스탄불 우체국,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우체국이 아닐까….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최대 규모 시장인 카팔르 차르쉬(그랜드 바자르) 대신 규모는 작지만 혼잡한 므스르 차르쉬(이집션 바자르) 가서 간단한 기념품을 샀습니다. 시장은 예니 자미에 딸린 복합 건물이기 때문에 시장 가게 대여료는 자미 운영비로 기부된다네요. 이런 식으로 자미 운영비가 조달되기 때문에 자미는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 없이 자미에 들어갈 있습니다.

 

생계형 낛시꾼으로 유명하다는 갈라타 다리.

뒤쪽에 갈라타 탑이 보인다.

 

갈라타 다리를 지나 출발역과 종착역 사이 거리가 600m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지하철, 1875년에 개통된 튀넬을 탔습니다. 열차 윗부분에 141 되었다고 큼지막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

 

 

 

갈라타

528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절 처음 만들어진 여러 재건축되었다고 합니다. 1630년대 헤자르펜 아흐멧 첼레비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로 갈라타 꼭대기에서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 위스퀴다르 언덕까지 무사히 날았다고 합니다.

 

 

 

 

 

갈라라 탑을 마지막으로 투어는 끝나고 가이드랑 헤어져서 관광객들끼리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빨간 전차를 타고 탁심 광장으로 갔습니다. 사실 지난 탁심 광장에서 테러가 발생한 적이 있어 여행 준비할 때는 신시가지는 가지 않는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이스탄불에 오니 가게 되더군요. 마침 좋은 일행도 있었고.

 

광장 중앙에 있는 11m 높이의 공화국 기념비는 아타튀르크와 독립운동 동지들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곳은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라는,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중심가인 이스티클랄 거리. 어둑어둑해지니 조명 덕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탁심 광장으로 오면서 탔던 빨간 트램은 19세기 노면 전차를 복원한 것인데, 제가 철로 위에서 사진을 찍었군요.

 

 

 

길거리에서 돈두르마도 사먹었는데, 1개당 15리라, 상당히 비쌉니다. 아이스크림 값이라기 보다는 상인들의 현란한 손놀림 공연비라고 해얄 같습니다.

 

저녁은 최고의 식재료를 판매하는 식료품 가게 식당인 남르 구르메에서 가지 골라서 먹었습니다. 양갈비가 맛있었습니다. 터키에서 고기는 역시 양고기입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이드가 추천해준 야경 투어에 나섰습니다. 비가 많이 왔는데, 셋이서 즐겁게 다녔습니다.

 

시작은 이스탄불대학

 

다음은 슐레이마니예 모스크

 

 

그리고 미마르 시난 테라스 카페에서 . 놀랍게도 생강차도 팝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기까지 가서 생각차를 시켜 먹었다는, 그리고 케이크에 함께 나온 레몬(?)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었다는 … . ^/^

원래 카페는 멋진 야경으로 유명한 곳인데 비가 와서 테라스나 옥상에 있을 수는 없었고, 곳곳에서 피워 대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실내에 있어야 했다는 아쉬웠습니다.

 

 

 

 

 

 

 

어느덧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늦은시간

이렇게 이스탄불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멋진 여행기를 쓰고 싶었는데, 내공도 시간도 부족하네요.

현재로선 어찌할 없는 형편이라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