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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벚꽃나무 아래 작은 음악회- 2010.4.10 지리산 네 번째 만인보에 다녀 와서

바람2010 2010. 4. 17. 12:55

봄날 벚꽃나무 아래 작은 음악회

- 2010.4.10 지리산 네 번째 만인보에 다녀 와서

 

지난 2월 28일 지리산 만인보 시작때 함께 하려던 것이 미루고 미루어져 드디어 4월 10일 네 번째 일정에 참가하였습니다.

수원역에서 구례구역까지 네 시간 남짓,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세/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긴 시간도 아닙니다.

 

구례구역에서 같은 기차의 다른 객실을 타고 온 일행을 플랫폼에서 만납니다. 역 앞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같이 지리산 자락 피아골에 있는 산방으로 이동합니다.

새까만 하늘엔 별이 그득그득하고 조용한 적막 속에 산방 뒤 계곡의 물소리가 우리가 자연 속으로 들어 왔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못내 아쉽지만, 다음 날 일정- 특히 토요일밤의 뒷풀이-을 생각해 막걸리 몇 잔으로 회포를 풉니다. 산방 뒤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 듭니다.

 

다음 날 일찍부터 챙겨서 식사를 든든히 하고 집결지인 광의면 사무소로 갑니다. 인천 사람들을 만나고, 여는 행사 후에 드디어 걷기 시작합니다. 점심이 되어 갈 쯤 광주와 목포 사람들이 왔습니다. 반가운 사람들입니다.

이 날 오전 걷기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기대했던 산길이 아니라 콘크리트 길을 걷기도 하고, 구례 시내를 통과하기도 합니다. 그나마 뚝방길을 걸을 땐, 흙길을 걷을 땐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문척교 주변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먹으니 한 두 가지씩 가져온 반찬이 진수성찬으로 바뀝니다. 역시 여럿이 함께 하면, 십시일반, 큰 일도 수월하게 됩니다.

 

점심 후에는 문화마당이 이어집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40대, 50대 아주머니까지 참여한 풍물패가 사물놀이 공연을 합니다. 한 분이 나와서 창작무용을 선 보입니다. 지리산 시인으로 알려진 원규 시인 나와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시를 낭송합니다. 낮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시인의 말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이원규 시인이 누구였던가, 버들치 시인이었나, 낙장불입 시인이었나, 생각해 보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저는 요즘 경향신문에 매주 수요일 연재되는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 연재에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문화마당이 끝나고 참가자들이 사는 지역별로 모여 인사를 합니다. 앞으로는 지역별 모임과 활동도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역시 조직과 활동의 기본은 지역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경기나 서울에서 모이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봅니다.

 

오후 걷기는 한결 낫습니다. 섬진강 둑길을 걸어 벚꽃이 만개한 도로를 지나 오봉정사로 갑니다. 오후엔 차에 태울까 했던 아이들도 끝까지 함께 합니다. 아이들보다 아이들을 업고, 목마 태우고 가는 아빠엄마가 더 힘들었을텐데, 이들도 힘든 내색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걷습니다. 힘들어도 좋은 모양입니다.

 

오봉정사에 도착해 다시 문화마당이 펼쳐집니다. 오봉정사 마당에는 걸으면서 봤던, 심은 지 몇 년 안된 벚나무들과는 다른, 참 그럴듯한,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나왔던 그 커다란 은행나무 같은 벚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벚꽃이 만개한 그 벚나무를 앞에 두고 옹기종기 앉았습니다.

한 분이 오봉정사의 유래와, 반달곰, 수달 지키기, 섬진강과 지리산 지키기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 장사익이라고 소문났다는 난초골 고명숙님이, 어릴 적 석유 사러 갈 때 쓰던 석유통 같은 물통을 의자 삼아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합니다. 조용필(?)의 간양록을 부르고, 정태춘서해에서를 부릅니다. 고전적인 가락으로 시작했던 아리랑이 순식간에 윤도현 밴드풍의 가락으로 바뀌어 빠르게 박수치며 목놓아 함께 부릅니다. 신청받은 장사익의 찔레꽃 대신 정태춘애고 도솔천아을 부르고 마칩니다.

진재선님이 나와서 하모니커로 봉선화봄날은 온다, 지리산을 수줍게, 그러나 멋지게 불어 제낍니다.

역시 이 날의 백미는 000님의 거문고 연주였습니다. 만인보에 참가하신 분들께 거문고 연주를 들려 주기 위해 00에서 5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다는 그는 예상과 달리 아주 앳되고 곱상한 청년입니다. 겉보기는 이십대, 그래도 거문고 연마를 꽤 했을 테니 삼십대 초반은 되지 않을까 자꾸 가늠해보게 하는 모습입니다.

개량한 거문고으로 뱃노래를 연주합니다. 내가 강에 배를 띄우고,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봄바람과 물소리를 들으며, 신선놀음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12분이라는 연주시간이 너무도 짧게 느껴집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즉흥곡을 역시 멋들어지게 연주합니다.

사람들의 앵콜 요청에 답해 연주한 오월의 노래 2는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아니 거문고에서 이런 소리가 날 줄이야! 노래로 부를 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던 이 노래가, 분노가 아닌 깊은 슬픔으로, 공감으로, 공명으로 다가올 줄이야! 이 연주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우리와 함께 했던 털보대장에게도 부탁했습니다.

 

좋은 날, 좋은 행사,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해 10월 짧은 템플 스테이 때 느꼈던 절과 불교와 삶에 대한 다른 생각, 지난 해 두 번의 구례행과 케이블카 반대 천왕봉 1인 시위에 대한 좋은 기억이, 이번 지리산 만인보에도 이어졌습니다.

참가한 일행들 모두 만족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누구는 친구들과, 누구는 반원들과 같이 오겠다고 합니다. 민들레 홀씨가 퍼지듯이 잔잔히 번져가면 마침내 물결이 되고, 파도가 될 것입니다. 역시 낮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진행자들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다섯 시간 버스를 타고 와서 거문고를 탄 분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네 번 모두 참가했다는 분도 있고, 끝날 때까지 스물 네 번 다 참가하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저 같은 이도 참가할 수 있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가하고,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공들이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을 강제하고, 그러나/그래서 참여는 저조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낮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또 떠오릅니다.

 

이 날의 뒷풀이는 글로 전하지 못하겠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안주와 좋은 술, 많은 이야기와 소통이 함께 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지리산 만인보에 관심이 있으시면 www.slowjirisan.net에 들려 보시길……

 

<2010.4.17.(토)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