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소설 [축제]를 읽고서

바람2010 2010. 9. 24. 16:22

15년 전쯤, 신입사원이던 시절, 썼던 글입니다. 그 땐 아직 이십대였는데, 어째 지금보다 더 원숙했던 것 같군요. 쑥스럽긴 하지만, 다시 보는 재미가 있네요. ^^;;

 

    나는 “문학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라는 고전적인(?)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고집한다면 나에게는 비록 어떤 글이 ‘문학적 형식’을 빌었다 하더라도 ‘문학’이 아닐 수 있다. 단지 문자화된 어떤 것일 뿐. 물론 나는 ‘문학’이, 더 나아가 ‘예술’이 이른바 ‘예술가’라고 일컬어지는 소수의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생산되고 향유될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글쓴 이 혹은 생산자의 ‘진지함’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진지함’으로 인해 그 스스로가 ‘삶’의 일부이어야 한다고, ‘현실’의 ‘반영’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른바 ‘시적임’과 ‘시’의 본원적이고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난데없이 어쭙쟎은 ‘문학론’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에 기대어 이 청준의 소설 [축제]를 읽어 보고자 하는 까닭이다.

 

    문학은 본래 ‘삶’에 대한 탐구인 까닭에 문학에서 ‘죽음’은 그 자체로 즉, ‘죽음’으로 존재하거나 다루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삶’의 ‘계기’로 ‘포섭’된다. 이 소설속에서도 ‘노모’(죽은 자)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노모’의 아들 준섭을 중심으로 한, 남겨진 자들의, 산 자들의 ‘삶’의 일부로 다루어진다. 죽은 ‘노모’와 얽혀진 삶의 단절과 그것이 동반해주는 각자의 ‘삶’의 한 부분으로. 또한 ‘노모’의 ‘삶’ 자체가 산 자들과의 관계속에서 다루어지며 특히, 글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아들 준섭과의 관계속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노모’의 ‘삶’은 ‘산 자’들에의해 ‘회고’되고 ‘해석’되며, 아들 준섭의 기억과 시각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간다. 준섭이 어린 딸에게 해 주었던, 동화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의 한 구절(“… 할머니가 자꾸만 키가 작아지시는 것은 할머니가 그 나이를 은지에게 나눠주고 계시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 끝내 더 나눠 주실 나이나 작아질 몸집이 다하게 되시면, 마지막으로 그 눈에 보이는 육신의 옷을 벗고 보이지 않는 영혼만 저 세상으로 떠나가시게 된단다. …”)이 극명하게 드러내주듯이 ‘삶’을 ‘완성’하는 것으로서 ‘죽음’은 다루어진다. 장례는 이를 위한 ‘산 자’들의 ‘의식’이다. 문학이 다른 모든 것들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일부로 ‘죽음’이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 소설속에서 산 자들의 삶은 ‘노모’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 그려진다. ‘노모’와 아들 준섭, 그리고 그의 처 은지네의 관계, 큰 며느리 외동댁과의 관계, 다른 자식들과의 관계, 용순과의 관계 .... 이러한 가족관계의 중심에 서 있는 ‘노모’의 죽음으로 인해 이들은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장례를 치루면서 ‘노모’와 함께 ‘노모’를 중심으로 설정되었던 자신들의 관계를 과거로 보내고, 새로이 자신들 사이에 관계를 정립하게 된다. 비록 노모의 ‘죽음’과 죽은 ‘노모’와의 관계라는 사실적 기초하에 이야기가 얽혀져 가나, 장례과정속에서 죽은 ‘노모’와의 관계가 정리되고, 산 자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고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다. ‘노모’의 자리를 아들 준섭이 대신 하게 됨으로써 다시 ‘산 자’에게로 관계의 중심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례는 ‘산 자’들의 ‘축제’가 된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기에 보편성을 획득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물론 불행히도 우리는 현재에도 이것이 일반적이라고 과감히 확신할 수는 없는-, ‘노모’와 아들의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손사래질’로 대표되고, 끊임없이 회상되는 ‘노모’의 아들에 대한 애정과 그 방식, 그리고 ‘노모’의 애닯은 삶. 또한 그 ‘손사래질’의 의미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깨달아 가고 어머니를 이해해가며 다시 자신의 어린 딸에게 ‘노모’를 긍정적으로 심어주는, 그리고 당신이 남기고 간, 그래서 일시적으로 끊어진 관계의 끈들을 이제 자신이 붙잡고서 다시 ‘산 자’들의 관계를 복원해내는 아들. 이들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전형적인’ 관계이다.

 

    지금은 많지 않은 것 같으나 - 설사 있다 해도 예전과는 달라졌겠지만-, 우리보다 조금 윗세대에서는 어린 시절의 유학(留學)은 드물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다. 갓 중학교 입학해서 한 학기동안 집을 떠나 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고, 그 경험탓인지 친구들보다는 비교적 적응을 잘 하긴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타 지역으로의 유학(留學)은 아직도 내 삶에 큰 경험으로 남아 있다. 두 주에 한 번 꼴로 귀가하고 매주 문안전화를 드렸던 그 시절, 모처럼의 귀가는 기다림의 설렘과 귀교 후의 아쉬움을 남겼고, 언제나 거의 판에 박힌 말들이 오가던 문안전화속에도 매번 가슴떨림이 있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면서 집에 가는 일도 뜸해지고, 간혹 주말에 문안인사를 걸러 아버지의 꾸중과 어머니의 섭섭함을 듣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한 편에 부모님께, 집안사에 무심해져가는, 그리고 타향살이에 젖어 들고 제 앞가림에 묻혀 허우적대는 내가 있고, 다른 한 편에 이제 이해하고 담담해 하시기보다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시는, 나이드신 부모님이 계심을 문득 문득 깨달으면서 나는 당혹해한다. 내 부모님께서 소설속의 ‘노모’처럼 ‘소설’같은 삶을 사시진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부모 세대 대개가 그러하듯이 누구 못지 않은 ‘인생살이’를 해 오신 것이 사실이다. 당신들께서는 ‘마지막 유교 세대’였다. 시대의 급변에 따라 쉼없이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했고, 이제는 당신들과는 너무도 다른 자식 세대에 맞추어 스스로를 바꾸고, 또 감추고 계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독특한’ 형식에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영화와 동시에 진행된 집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하나, 소설 각 장(障)에 끼어 있는 “감독님께” 드리는 편지는 이 소설의 이야기들이 ‘개인사’로 치부되지 않고 객관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의도에서 작가가 채택한 3인칭 시점보다 오히려 사이 사이 흐름을 끊고 나선 ‘현재’가 독자로 하여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또한 이 소설이 갖는 장점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