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생각, 바람 이야기

[내 인생의 책]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바람2010 2011. 8. 6. 23:12
*이 글은 [까말(놓고 해)] 창간준비5호(2011년 7월)에 실린 글입니다.


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그랬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 감동받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곤혹스럽다고. 자기가 읽은 책이 한 두 권도 아닌데, 그 많은 책 중에 어떻게 고르겠냐고. --;;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에게도 책 소개나 추천은 괴롭다. 내가 읽은 책이 뭐가 있더라,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뭐였지? 내용은 … ?

무슨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쓸까 고민하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내 인생 이야기와 책 이야기를 같이 쓰기로 했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내 인생의 책>이라는, 거창한 꼭지 이름에도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누구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하던데, 불행히도 난 유치원에 다니지 못했다. 내가 지금도 여러 모로 부족한 것은 유치원에 다니지 못해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우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 동네에서 유치원에 다녔던 아이는 한 명뿐이었다. 내 친구 동생. 내 친구는 못 다니고, 친구 동생만 유치원에 다녔고, 내 친구는 못 먹고 내 친구 동생만 매일 야구르트 아줌마가 배달해 주는 야구르트를 먹었다.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는 것, 야구르트를 먹지 못하는 것이 당시에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특혜를 누리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기에.

 

대신 참 잘 놀았다. 골목에서, 동네 뒷산에서, 신작로 건너 모래사장에서, … . 누구처럼 소를 키우거나, 농사를 거들 필요도 없었고, 그냥 놀면 됐다. 또래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도 난 1년을 더 놀았다. 또래들이 학교에 가서 신입생 막내 노릇을 하는 동안, 난 동네 동생들을 데리고 골목대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내게 리더십 비스무레한 게 있다면 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조금만 남아 이 모양이 아닐까? ㅋㅋ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많은 친구들, 넓은 운동장, 그리고 책.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한글을 배울 수 있었던 나는 한글에 빠져 들었고 곧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책에 빠져 들었다.


 

계몽사에서 나온, 삽화도 몇 개 없었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보름 만에 다 읽었다. ‘이제 그만 자라’는 외할머니와 책을 더 보겠다고 실랑이 하면서. ‘거울이 자기보다 더 예쁘다고 했다고 어린 아이를 독살하려는 이야기([백설공주])’나, ‘아이들을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이야기([헨젤과 그레텔])’, 생각해 보면 마땅히 ‘19금’이어야 할, 지금 문제되고 있는 폭력적, 선정적인 게임/방송에 못지않은 이상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재미있게 읽었다.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아직도 네 엄마 아빠 다리 밑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백조가 아니라 거위가 아닐까([미운 오리 새끼])’ 생각하며 서럽게 울기도 했다.

서양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그리스-로마 신화]도, [성서 이야기]도, [호머 이야기(일리아드)]도 이 전집을 통해 처음 접했다. 물론 생략된 것도 많고, 잘못된 부분도 많지만, 좀 과하게 말하면 내 지식의 대부분은 이 빠~알간 책들에서 비롯되었다고나 할까, ㅋㅋ. 나중에 원작에 좀 더 가까운 책들을 읽게 되었지만, 역시 첫 경험이 가장 강렬한 법이다. 구약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가면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수많은 이름과 반복에 놀라고, 레위기에서 제단 이야기에 질려 결국 포기했던 나에게 전집의 성서 이야기는 정말 소중했다.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계몽사 전집들이 또 있었으니, 바로 [세계위인전집]과 [한국위인전집]이다. 정작 자기 아이들은 안 읽고, 셋방 ‘머스마’만 열심히 읽는다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푸념에 눈치 보며 빌려 봤던, 역시 아주 빨갛던, 이 위인전들이 진로 선택과 완벽주의적인(?)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리스 르브랑의 [괴도 루팡]과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를 읽으면서 왠지 모범생 홈즈보다 범죄자 루팡에 더 끌렸다. 그 때부터 반골 기질이 있었던 걸까? 돈이 생기면 학교 앞 서점에서 문고판 [루팡] 시리즈를 사곤 했다. 문고판 [루팡] 시리즈 한 편을 사서 집에 걸어가는 동안 다 읽고, 다시 서점으로 되돌아가 다른 편으로 바꿨던 적도 있다. 묘기라고? 추리소설 주인공의 활약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지, ㅋㅋ. 한동안 더 많은 추리소설에 빠져 들기도 했지만, 역시 루팡이 일번이고, 홈즈가 이번이다.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머리 아팠던 것은 [죄와 벌], 그리고 [파리대왕]이었던 것 같다. 문고판이 아니라 두툼한 책으로 읽었는데, 정말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벌을 받아야 하나([죄와 벌]), 내 지적 능력이 파리수준에도 뭇 미치는 게 아닌가([파리대왕])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까만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는 … ,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위대한 한글 … .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시절이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시기였다.


아, 만화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지. 껌 한 통에 한 권씩 들어 있던 그 쪼그만 만화책, 지금 생각해보면 별내용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 만화책 때문에 만화껌을 샀고, 이미 본 만화책이 들어 있는 껌을 골랐을 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기억하시나. 그 조그만 만화책과 만화껌!

 



이번에는 그냥 여기까지 써 볼란다. 반응 봐서 괜찮으면 나중에 또 쓰지, 뭐. ㅋㅋ